여러 가지가 낯설다.

작품 해설을 포함해도 110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이 그렇고. 교과서가 아닌 책으로는 거의 처음 보는 희곡이 그랬고.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 결론이 그랬다.

이 책을 읽기까지

“소년이 그랬다”라는 책을 읽었다. 나초(나이스 초이스)라는 트레바리 북클럽의 첫 번째 읽을거리다. 최근 선택이라는 것의 어려움(동시에 중요함)을 느끼고 있기에 “선택” 그 자체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고 싶었다. 첫 번째로 선정된 책을 찾아봤을 때 사실 살짝 당황했다. 북클럽이라고 하니 주제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질 책이 선정되어 있을 것이라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책을 찾았는데 다 읽어 내려가는데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110 페이지 짜리 희곡 책이었기 때문이다. 뭐 좋다. 내 생활의 범위, 생각의 범위를 벗어나고자 북클럽에 가입을 한 것이니 내가 읽는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이 책은 중학교 2학년 민재, 3학년 상식이 주인공이다. 이들이 장난으로 던진 돌에 사람이 죽게 되면서 발생되는 사건을 다룬다.

나의 청소년 시기를 떠올리다.

  • 장난 삼아 육교 위에서 돌을 던지는 장면

상식: 세 시 방향이나 갈겨. 민재: 벤츠! 상식: 아우디도 온다! 민재: 동시 공격! 상식: 오케이! 함께: 쓰리, 투, 원, 발사!

민재와 상식이 육교 위에서 돌을 던지는 장면에서 잊힌 기억이 떠올랐다. 최소한 최근 10년간은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이다. 아마도 부끄러운 기억이라 스스로 묻어 두었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학년 차이가 나는 사촌 형 집에 종종 놀러 갔었다. 둘이 계란 프라이를 몇 개씩 해 먹으며 저녁 늦게 까지 놀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쩌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에게 계란을 던지는 장난을 하게 되었다. 3~4층 정도 되는 아파트였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보이면 그 사람 앞으로 계란을 하나 던지고는 5분 정도 창밖을 내다보지도 못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였다. 뭔가 나쁜 짓을 했다는 쾌감, 그리고 누군가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즐겼던 것 같다. 이 장면이 떠오른 순간 나는 민재가 되어 이 소설에 몰입하게 되었다. 나는 왜 그런 장난을 했을까? 그때 내가 던진 계란에 누군가가 맞았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계란에 맞아 지나가던 사람의 눈이 실명되었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 오토바이 배달

멀지 않은 곳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 순간, 둘은 소리가 들리는 곳을 본다. 함께: 어! 민재: 돼지 새끼다. 배달 중인가 봐.

돌을 던지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돼지 새끼’가 소설에 등장한다. 중학교 때 같은 반에 오토바이로 중국집(당시 언어로 짱개) 배달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녀석은 소설의 ‘돼지새끼’처럼 같은 반 친구들을 많이 괴롭혔고, 학교에도 곧잘 빠지곤 했다. 그리고 학교에 온 날에는 야한 잡지 혹은 사진들을 친구들과 킥킥 거리며 돌려 보기도 했었다. 당시에는 싸움도 잘하고 왠지 자유롭게 사는 그리고 멋지게 오토바이도 타고 다니는 그 친구를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지나고 개학한 날 그 친구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민재와 상식의 아지트에서

민재: (둘러보며) 오, 레알 쩐다. 여기 어디야? 상식: 보면 몰라? 집이잖아. 민재: 형네 집? 상식: 옛날에 살던 집이라고, 븅신아. 민재: 완전 구린데, 짱 박혀 있기는 짱이겠네.

민재와 상식이 현실로부터 도피해서 숨어 있는 아지트. 나에게도 아지트가 있었다. 나는 대학생 때 사춘기를 맞았다. 요즘에는 사춘기가 빨라져서 초등학교 고학년에 이미 사춘기가 온다고도 하는데 꽤 늦은 편이다. 당시 이유 없는 반항, 이유 없는 부인, 답이 없는 고민이 찾아왔다. 이때 나의 회피처가 되어 주던 곳이 동아리방이었다. 수업 대신 동아리방에 앉아 있기도 했고 방학 때 집에 내려가는 대신 동아리방에서 친구들과 먹고 자고 했다.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지하여서 쾌쾌한 곰팡이 냄새도 나고 종종 술병들도 굴러다녔지만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했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은 고민이 없어졌다. 학점은 나오지 않았고 학고로 이어졌다.

어른이 되어 나의 그때를 생각해 보다.

“나는 어른인가?”라고 물었을 때 손쉽게 “응”이라는 답이 나오진 않는다.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결혼과 출산을 겪었으니 이제는 사회적인 기준에서 마지못해 “응”이라고 대답해야 하겠다. 이 소설은 잊혔던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 동시에 어른이 된 내가 나의 어린 시절을 뒤돌아 보게 한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계란을 던지는 것은 도저히 장난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장난이냐 범죄냐 묻는 다면 차라리 범죄라고 이야기해야겠다. 지금은 계란을 던졌을 때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펼쳐진다. 도대체 왜 그 계란을 던져야만 했었는지, 왜 그 이후 상황들에 대한 고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던 친구는 도대체 뭐가 부러웠을까? 그 친구가 가진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얻은 것이었는지 몰랐겠지? 차라리 공부 잘하는 친구 운동 잘하는 친구를 부러워하지 그랬니? 거봐라. 어른 말 안 듣고 위험하게 오토바이 타고 다니니까 그렇게 사고가 나는 것 아니겠니. 방황했던 나의 대학시절을 되돌아보면 뭐가 그리 힘들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큰 책임도 없었고, 구속하는 사람도 없었고 자유와 시간이 주어졌던 시기인데. 지금은 잠을 줄여야 할 수 있는 공부도 당시에는 마음껏 할 수 있었고, 세상의 모든 기회가 젊은이라는 이름 아래 주어졌던 시기였던 것 같은데.

소년과 어른 사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민재와 상식을 추적하는 두 형사인 정도와 광해다. 민재 역을 맡은 배우는 광해를, 상식 역을 맡은 배우는 정도를 동시에 연기한다. 재미있는 설정이다. 쫓기는 청소년과 그를 쫒는 형사를 한 배우가 동시에 연기한다니. 마치 모든 사람이 소년이었고 동시에 언젠가 어른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당연하게도 나도 소년이었고 시간이 흘러 지금은 어른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나를 보면 그저 철없는 아이 혹은 청소년이고 지금의 나를 보면 “꼰대”라는 말이 어울리기도 한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는 왜 어린 시절의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 그리고 나는 지금의 청소년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서 나의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었을 때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35년을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경험했다. 꼭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생겼고 이 사회가 가치를 두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 나 자신의 소중함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시행착오를 겪어 가는 어린 친구들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든다. 내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꼭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청소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지나버리면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 그 중요하고 아픈 경험들을 잊어버리는 것이.

두 아이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정도와 광해는 어른(=사회)이 가지는 두 가지면을 대표한다. 청소년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전에 사회의 구성원으로 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 두 아이의 처벌에 대한 논의

광해: 걔네가 던진돌이 차에 맞지만 않았어도 장난으로 끝났을 일이에요. 정도: 사람이 죽었어. 그게 중요해! 광해: 평범한 애들이잖아요. 범죄 경력이 있던 애들도 아니구요. … 정도: 만약에 그 죽은 운전자가 네 아버지면? 누가 던진 돌에 재수 없게 맞아서 차 앞 유리가 깨지고, 안구가 함몰되고, 가드레일 받아서 50미터나 질질 끌려가다가 죽었어. 그게 네 아버지면? 광해: 그 아이가 박경사님 열네 살짜리 따님이라면요? 그 따님이 육교에서 돌을 던지 거라면요? 그 애가 갑자기 집에 와서, 아빠 나 사람을 죽였어, 그렇게 말한다면요?

사회는 민재와 상식에 대해 실형을 선고하지 않았다. 이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쉽지 않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이를 교대로 상황에 대입해 보면 더욱 혼란스럽다.

모든 선택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북클럽에 처음에 가입한 의도는 “좋은 선택”을 위한 일반적인 방법론을 찾고 싶었다. 모든 선택에 대해 정답을 찾고 싶었고 그렇지 못하다면 최대한 최적에 가까운 선택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 모든 선택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최적이라는 것이 무의미한 경우도 있다. 사회는 민재와 상식에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반대로 그 사건으로 인해 피해자 가족에게는 더 큰 상처를 안겼다. 이 선택이 더 옳은 것인가는 앞으로 이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갈 민재와 상식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있다. 갈림길에서 선택은 중요하다. 시간은 뒤돌아가 다시 선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간과하는 것은 선택이라는 것의 결과는 선택 시점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에 결정되는 것이다. 선택이 중요한 만큼 선택 후도 중요하다. 소설을 읽고 한 가지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