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Yes Day”가 있다. 생일을 맞은 사람의 특전이다. 다른 가족들은 생일자가 원하는 것에 모두 “Yes”를 해야만 한다. 오늘은 어린이 날이었다. 특별하게 준비한 것도 없는지라 아이들에게 “Yes Day”를 해주기로 했다.

둘째 도연이는 어젯밤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 “Yes Day”를 길게 가져가려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아빠의 말에 설득되었다. 그리고는 평소보다 2시간 빨리 일어났다.

아빠: "아침 식사로 무엇을 먹고 싶으십니까?"
도연: "아침에는 케이크를 사 와서 오빠와 함께 생일 파티를 하고 케이크를 먹고 싶어요~"
아빠: "Yes"

그리고는 8시도 안되어서 케이크를 사러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그 사이에 일어난 아들과 엄마의 대화가 들렸다.

엄마: "우리 아들은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승준: "엄마랑 배 놀이를 하고 싶어요~"
엄마: "Yes"

우리 집 배 놀이의 유래는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지금은 침대 위에서 베개, 이불, 인형을 활용해서 배/집/동굴 등을 만들어서 노는 모든 놀이를 말한다. 매번 도연이가 승준이에게 배 놀이를 하자고 찡얼 거려서 오빠가 같이 놀아 주곤 하는데, 승준이는 이 놀이를 엄마랑 하고 싶었나 보다.

딸과 케이크를 사 왔다. 창 밖으로는 아침의 기운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잘라 나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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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기분 좋은 아이들

오늘의 주인공 두 분은 만족하신 모양이다. 그리고 오늘은 공부를 하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신 후에 오스모로 탐정 게임을 시작하셨다.

아빠: "혹시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어? 재미있는 곳 놀러 가지 않을래?"
승준: "아니 없어. 집에서 놀래"

어린이날에는 엄마, 아빠 손을 잡고 풍선을 들고 놀이공원에 다녀와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은 아빠가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저 오늘 하루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 보기로 했다. 게임을 마친 도연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아빠가 공룡 밑그림을 그려 주면 도연이가 색칠을 하겠단다. 주문도 아주 구체적이다.

도연: "보라색을 많이 쓸거니까 '브라키오'가 아닌 '보라키오'로 해줘."
     "글자는 색칠을 잘할 수 있도록 두껍게 해주고."
     "공룡은 오빠가 예전에 그런것 처럼 줄무늬로 해 줘."
아빠: "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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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벽에 장식된 도연이의 작품

밑그림을 그려주고 보니 딸이 여러 번 내게 그려달라고 요청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마다 회사일을 하고 있었거나 집안일을 하느라고 나중에 해주겠노라고 했었다. 그리 오래 걸리는 일도 힘든 일도 아닌데 왜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을까 싶었다.

승준이도 그림 판이 차려진 김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해가 뜨는 바다를 그리고는 필을 받아서 밤 그림도 함께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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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의 클라스

미술 학원 선생님이 찍어서 카톡에 올려 주신 사진들은 종종 보았다. 하지만 그리는 과정을 지켜본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들을 이렇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싶어서 작은 감동이 밀려왔다. 아이들의 그림에 열심히 칭찬을 해주며 “이제 엄마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 같아!”라고 이야기해주었더니 엄마에게 그림 그리는 것을 알려 주고 싶다고 한다. 어이쿠. 엄마 미안.

그 뒤로도 아이들이 “Yes”를 요청하는 것들은 대부분 엄마, 아빠와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 “탕 목욕하고 싶은데 엄마가 들어와 있으면 좋겠어”
  • “아빠와 함께 셈셈 피자가게 게임 하고 싶어”
  • “가족 다 같이 모여 도둑잡기 게임 하고 싶어”
  • “아빠와 같이 레고 하고 싶어”

그동안 나름 시간이 날 때에는 아이들과 함께 해주려고 했다 싶었는데 아이들 기준에서는 한참 부족했었나 보다.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밤 9시가 넘어서니 엄마, 아빠는 Yes Day를 지속할 체력이 떨어져 버렸다. 그래서 Yes Day의 종결을 선언했다. 아이들도 만족스럽게 놀았는지 크게 보채 지는 않고 방으로 들어와서 잘 준비를 했다. 누워서 불을 끄고는 아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빠: "오랜만에 오늘의 좋았던 일, 안 좋았던 일 이야기하기 해볼까?"
도연: "오늘은 Yes Day라 안 좋았던 일은 하나도 없었어, 좋았던 일은 아침에 생일 케이크 먹어서 좋았고"
      "우리 마음대로 해서 좋았어."
아빠: "며칠 뒤면 어버이날 되는 것 알지? 그때는 엄마, 아빠 Yes Day다~"

아이들이 COVID-19에 적응해 버린 것인지, 이 좋은 날씨에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아빠 기준에서는 이상한) 어린이날이 되고 말았지만, 아이들은 그저 자기 마음대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즐거웠던 하루였다. 그래 고객님이 만족하시면 되지.

아이들의 새근새근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워 내게 Yes Day가 주어지면 나는 어떤 부탁을 할까? 생각을 해봤다.

  • 동료들에게 가서, “이 일 저 일 오늘 저 대신 좀 해주실래요?” “YES!”
  • 파트너사에 가서, “오늘 이 계약을 해주시겠어요?” “YES!”
  • 식당에 가서, “(리필 안 되는) 이거 리필 좀 해주시겠어요?” “YES!”
  • 와이프에게 가서, “오늘 애들이랑 좀 놀아 주렴~ 난 좀 놀 테니” “YES!”
  • 만나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던 사람에게 가서, “오늘 시간 좀 내어 주실래요?” “YES!”

하하. 어린이 같은 즐거운 생각과 함께 나도 올해 어린이날을 이만 보낸다.